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2026 재팬 IT 위크 현장에서 한국 스타트업 경영진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 있다. “일본은 아직도 RPA다.” 무하유 COO 김희수 씨는 일본의 트렌드 변화 속도가 한국보다 3~4년 늦다고 진단했다. 지난해까지 재팬 IT 위크의 핵심 키워드가 RPA였는데, 올해 들어서야 에이전틱 AI가 서서히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그러면 한국은 이미 에이전틱 AI로 넘어갔는가”라는 질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RPA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데, 이 전환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오늘은 이 두 가지를 뜯어보려 한다.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RPA에서 에이전틱 AI로의 전환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한국이 3~4년 앞서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RPA가 해결한 것과 해결하지 못한 것
먼저 RPA가 실제로 어디에서 작동했는지부터 봐야 한다. RPA의 성공 조건은 명확하다. 반복되는 작업, 정해진 규칙, 변하지 않는 인터페이스. 이 세 가지가 갖춰진 업무에서 RPA는 강력하다.
이번 기사에 나온 57세 영업직 김모 씨의 사례가 좋은 예다. 반복적인 업무에 쓰이던 시간을 RPA로 줄이고, 그 시간을 실적 관리, 데이터 분석, 영업 기획에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사가 제공한 사내 교육을 계기로 RPA를 접했고, 직접 업무에 적용하면서 생산성이 달라졌다. 57세라는 나이에 새로운 자동화 도구를 스스로 익혀서 실무에 적용한 이 사례는, RPA가 IT 전문가가 아닌 일반 직원의 손에서도 실제로 작동한다는 걸 보여준다.
일본이 RPA 강국인 이유도 여기 있다. 정밀하고, 규칙 기반이고, 반복적인 업무에서 강점을 가진 일본 제조·금융 산업의 특성이 RPA와 잘 맞았다. 수십 년에 걸쳐 구축된 업무 프로세스를 규칙으로 정의하는 작업을 일본 기업들이 잘 해왔고, 그 위에 RPA가 얹혔다.
근데 RPA의 한계는 그 강점의 이면이다. 화면 레이아웃이 바뀌면 봇이 멈춘다. 예외 상황이 생기면 사람이 개입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를 RPA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결국 “완전 자동화”가 아니라 “조건부 자동화”에 머문다.
매드업이 보여준 전환의 방향
코스닥 상장 심사를 통과한 매드업의 사례가 이 전환을 잘 보여준다. 기존 RPA 수준에서 나아가, 인력에 의존하던 분석과 기획 영역까지 버티컬 AI로 시스템화했다는 내용이다.
이게 RPA와 에이전틱 AI의 경계를 잘 보여준다. RPA가 처리하는 건 실행이다. 버튼을 누르고, 데이터를 복사하고, 양식을 채운다. 에이전틱 AI가 처리하는 건 판단과 실행이다. 이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할지, 어떤 전략적 결론을 끌어낼지, 다음 행동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수행한다.
매드업이 분석과 기획 영역을 AI로 시스템화했다는 건, 이 판단 영역을 사람에서 AI로 이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광고 캠페인 성과 분석, 타겟팅 전략 수립, 예산 배분 결정. 이런 작업들은 RPA로는 건드릴 수 없었다. 규칙으로 정의하기 어렵고, 맥락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에이전틱 AI는 이 영역으로 들어간다.
투자자 보호 장치까지 IPO 매력도에 포함됐다는 기사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에이전틱 AI를 활용한 자동화 시스템이 이제 기업 가치 평가에 반영될 만큼 현실적인 경쟁력 요소가 됐다는 신호다.
RPA에서 에이전틱 AI로 – 기술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가
에이전트 아키텍처를 직접 설계한 입장에서 이 전환을 기술적으로 보면 차이가 명확하다.
RPA는 결정론적(deterministic)이다. 입력이 같으면 출력이 항상 같다. 화면의 특정 좌표에서 버튼을 찾아 클릭하고, 특정 필드에 값을 입력하는 행위는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 이 예측 가능성이 RPA의 신뢰성을 만들지만, 동시에 유연성의 한계가 된다.
에이전틱 AI는 확률론적(probabilistic)이다. 같은 목표를 주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경로로 실행될 수 있다. 이메일을 분류하고 적절한 담당자에게 라우팅하는 에이전트는 이메일 내용을 이해하고 맥락에 맞게 판단한다. 규칙 테이블이 없어도 새로운 유형의 이메일에 대응할 수 있다.
LangGraph로 멀티에이전트 시스템을 설계할 때 이 차이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면 이해가 쉽다. RPA 방식으로 구현한다면, 이메일 분류 규칙을 모두 조건문으로 코딩해야 한다. “제목에 ‘환불’이 포함되면 고객서비스팀으로, ‘계약’이 포함되면 영업팀으로” 같은 방식이다. 에이전틱 방식으로 구현하면, 에이전트가 이메일 전체 맥락을 읽고 어느 팀에 보내는 것이 적절한지 스스로 판단한다. 심지어 “이 이메일은 고객서비스와 영업 모두에 관련되니 두 팀에 동시에 전달하면서 각각 다른 맥락을 강조한 요약을 첨부”하는 판단까지 한다.
이 차이가 업무 범위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RPA는 사람이 미리 정의한 범위 안에서만 자동화가 가능하고, 에이전틱 AI는 목표를 주면 범위를 스스로 정해서 실행한다.
일본이 3~4년 늦다는 말의 진짜 의미
재팬 IT 위크에서 나온 “일본이 3~4년 늦다”는 진단은 단순히 일본이 뒤처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본이 RPA에 강점을 가진 건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 산업 구조의 특성 때문이다. 근데 RPA가 잘 작동하는 환경은 역설적으로 에이전틱 AI로의 전환을 느리게 만든다. 이미 RPA로 효율화된 업무를 굳이 다시 에이전틱 AI로 바꿀 이유가 없고, RPA가 커버하는 반복 업무 너머의 판단 영역에서는 자동화 경험이 부족하다.
한국이 3~4년 앞서 있다는 건, 한국이 RPA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은 탓에 그 한계를 더 일찍 경험하고, 그래서 더 빨리 에이전틱 AI로 눈을 돌렸다는 역설적 해석도 가능하다. RPA의 성공 경험이 없어서 오히려 에이전틱 AI로 직접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마음AI 유태준 대표가 일본 현장에서 짚은 것도 이 지점이다. 일본은 이미 RPA 등 다수 공정에 자동화를 진행했기 때문에, 이제 피지컬 AI가 그 다음 단계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RPA로 커버하지 못한 영역, 즉 물리적 작업이 남은 영역에 피지컬 AI와 에이전트의 결합이 필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실제로 어디까지 와 있나
유아이패스의 2026 에이전틱 자동화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약 24%가 이미 에이전틱 AI를 도입했다. 아태지역 기업 전체의 40%가 AI 에이전트를 활용하고 있고, 50% 이상이 2026년까지 도입을 계획하고 있다는 수치와 비교하면, 한국은 도입 속도에서 앞서지만 아직 절반에 못 미친다.
이 24%라는 숫자를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에이전틱 AI를 도입했다는 게 LangGraph나 자체 에이전트 프레임워크로 실제 업무 에이전트를 구현했다는 뜻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기업용 SaaS에 내장된 AI 어시스턴트 기능을 쓰는 것도 에이전틱 AI 도입으로 집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이전트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구조를 갖춘 기업은 그보다 훨씬 적다.
근데 이게 나쁜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아직 시장이 충분히 열려 있다는 의미다. 에이전틱 AI로의 전환이 완성된 게 아니라 진행 중이라는 것, 그리고 그 전환 과정에서 실제 기술 경험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RPA와 에이전틱 AI가 공존하는 현실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싶다. RPA가 에이전틱 AI로 완전히 대체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규칙이 명확하고, 예외가 거의 없고, 신뢰성이 최우선인 업무에서 RPA는 여전히 최적의 선택이다. 보험 청구서 처리, 급여 계산, 재고 집계처럼 수백만 건을 처리해야 하고 오류가 용납되지 않는 업무에서 에이전틱 AI의 확률론적 특성은 오히려 리스크가 된다.
현실적인 그림은 이렇다. RPA가 처리하던 반복 실행 업무는 RPA가 계속 담당하거나 에이전트의 도구(tool)로 편입된다. 에이전트가 판단을 내리면, 그 판단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RPA 봇을 호출하는 구조다. 판단은 에이전트가, 실행은 RPA가 맡는 분업이다.
LangGraph 에이전트 구조에서 보면 이게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에이전트의 tool 목록에 RPA 실행 함수를 추가하면, 에이전트는 필요할 때 RPA를 호출하는 방식으로 기존 자동화 자산을 활용할 수 있다. 기존에 구축한 RPA를 버리는 게 아니라,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레이어 아래로 흡수하는 것이다.
마무리: 키워드 전환이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
재팬 IT 위크에서 관찰된 일본의 RPA 집중 현상과 에이전틱 AI로의 느린 전환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내에서도 RPA에 투자한 기업들이 “에이전틱 AI로 가야 하는지, 기존 RPA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점이다.
키워드가 RPA에서 에이전틱 AI로 바뀌는 건 트렌드의 변화다. 근데 그 변화가 실제로 업무 현장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에이전트가 실제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57세 영업직이 RPA로 반복 업무를 줄이고 기획에 집중하는 것처럼, 에이전트가 분석과 판단을 대신하고 사람이 방향과 리드에 집중하는 방향으로의 실질적인 이동이 필요하다.
일본이 3~4년 늦다는 말은, 달리 보면 한국이 3~4년의 실험과 실패를 먼저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경험이 실제 기술 설계와 운영 노하우로 축적될 때, 키워드 전환이 비로소 진짜 경쟁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