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 저축은행 프로젝트 킥오프에 불려 갔다가, 회의실에서 꽤 낯선 장면을 봤다.
“AI 개발자 두 명, RPA 운영 인력 세 명, AI 에이전트 팀장 한 명을 2월 안에 뽑아야 합니다.” 인사 담당자가 채용 요건을 읊는데, 나는 RPA라는 단어가 그렇게 또렷하게 들린 게 오랜만이었다. 한때 “곧 사라질 기술”이라고 썼던 분석 리포트가 불과 2년 전 일인데, 현장은 RPA를 걷어내기는커녕 AI와 나란히 앉혀 놓고 있었다. 대신 역할이 바뀌었다. 과거 RPA가 맡던 ‘화면 클릭 자동화’는 AI 에이전트에게 넘기고, 기존 RPA 봇은 이미 깔려 있는 레거시 인터페이스를 건드리는 ‘막일’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 풍경이 최근 쏟아진 AI 뉴스들과 정확히 겹쳐 보였다. 한 매체는 “RPA나 챗봇이 반복 업무를 처리하는 수준이었다면, 에이전틱 AI는 복합적인 판단과 협업을 요구하는 업무까지 수행한다. 즉, ‘직무 자동화’에서 ‘조직 대체’로 진화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기사는 “장애인 인력이 주로 맡았던 단순 사무보조나 반복 업무를 RPA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어서, 기존 보조적 직무 자체가 사라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동시에 팔란티어, 엔비디아, 오라클, 세일즈포스, 세레브라스, 마카나락스, 다보링크-비드라프트 같은 이름들이 ‘에이전틱 AI 인프라’라는 공통의 전쟁터에 이름을 올렸다.
흩어진 기사처럼 보이지만, 한데 모아 놓고 보면 그림이 선명해진다. 2026년 봄, 기업용 AI는 지금 거대한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전환기의 속도는 현장 실무자가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LangGraph 기반 멀티에이전트를 몇 차례 납품하고, Azure AI로 RAG 파이프라인을 굴려본 입장에서, 지금 판에서 무엇이 진짜 변하고 있는지 실무 관점으로 정리해 본다.
RPA가 먼저 깎아낸 자리, 그리고 그 위로 올라타는 에이전틱 AI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건 RPA라는 기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다. 재미있게도 업계 시선이 두 갈래로 찢어져 있다. 한쪽에서는 RPA를 ‘저물어가는 기술’로 규정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RPA를 AI 에이전트 발판으로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저물어가는 쪽 증거는 노동시장에서 먼저 나왔다. 은행권 장애인 고용 관련 보도에서 “과거 장애인 인력이 주로 맡았던 단순 사무보조나 반복 업무를 RPA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고, 은행권 관계자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기존 보조적 직무 자체가 사라지는 추세라고 토로했다. 이건 단순 기술 평가가 아니라 ‘실제로 일자리가 줄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농관원의 친환경 인증 시스템에서도 플랫폼별 매월 집중 점검 기간을 운영하며 로봇자동검색(RPA) 기법으로 단속 인력 150명이 직접 하던 일을 대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제주개발공사와 코리아에프티 사례에서도 RPA와 AI 기반 디지털 전환을 통해 인력 운영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는 내용이 반복됐다.
그런데 같은 주간에 “챗GPT 다음은 ‘행동하는 AI'”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한 번 더 꺾인다. RPA나 챗봇이 반복 업무 처리 수준이었다면, 에이전틱 AI는 복합 판단과 협업을 요구하는 업무까지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직무 자동화에서 조직 대체로 진화했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이건 RPA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선언하는 것과 같다.
실무자 관점에서 이 대비가 핵심이다. RPA는 ‘화면을 보고 클릭하고 입력하는’ 기계식 자동화였다. 정해진 규칙에서 한 발만 벗어나도 봇이 멈춘다. 예외 케이스를 하나씩 코딩해 넣어야 하는 탓에 유지보수 비용이 무섭게 늘어난다. 한 금융권 프로젝트에서 RPA 봇 60여 개를 운영하는 팀을 본 적 있는데, 봇보다 봇을 고치는 개발자가 더 많았다. 이게 RPA의 본질적 한계다.
에이전틱 AI는 이 구조를 다르게 푼다. LLM이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을 내리며, 도구 호출과 API 연결을 통해 직접 행동한다. 예외 상황을 모두 코딩할 필요가 없다. 물론 프로덕션에 올리면 이야기가 다시 복잡해지지만, 적어도 ‘규칙에서 조금 벗어난 문서 한 장’ 때문에 봇이 멈추는 일은 줄어든다.
저축은행 사례를 다시 가져와 보자. “AI 운영 담당은 AI 자동화 시스템 구축을 맡으며, AI 에이전트 및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RPA) 개발·구축·운영, 사용자 지원과 교육 등을 수행한다”는 대목이 있다. 중요한 건 RPA가 사라진 게 아니라, AI 에이전트와 RPA가 한 팀에 묶였다는 점이다. 에이전트가 판단을 내리고, RPA 봇이 레거시 시스템의 키보드 입력을 대신 쳐준다. 역할 분담이 뒤집힌 것이다. 전면에 선 건 에이전트, 뒤에서 허드렛일을 맡은 건 RPA 봇이다.
이 역할 재편은 앞으로 2~3년간 더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 기업이 레거시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걷어내지 못하는 이상, RPA 봇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봇을 지휘하는 두뇌는 AI 에이전트가 된다. RPA 자체가 죽는 게 아니라 ‘RPA 단독 시대’가 끝나는 것이다.
에이전틱 AI의 진짜 병목, 데이터 인프라 전쟁
그럼에도 에이전트를 붙이면 모든 게 풀린다고 기대하면 곧바로 현실에 맞는다. 한 기사는 “지능형 애플리케이션의 경쟁력은 모델 성능만이 아니라, AI가 기업의 실제 데이터 계층과 얼마나 깊게 결합돼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진단하면서, 별도의 그래프 데이터베이스, 문서 데이터베이스, 벡터 데이터베이스를 각각 두고 다른 추론 작업을 처리하는 기존 방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오라클이 이 세 가지를 통합한 솔루션을 꺼내 든 배경이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골치인지는 RAG 파이프라인을 직접 깔아본 사람만이 체감한다. 고객사 POC를 하다 보면 데이터가 늘 세 가지 계층에 흩어져 있다. 관계형 DB에 들어간 고객 정보, 공유 드라이브에 흩어진 PDF와 HWP와 DOCX 파일들, 그리고 벡터 DB에 인덱싱된 임베딩 데이터. 각각 다른 팀이 관리하고 다른 예산으로 돌아간다. 에이전트가 한 번의 질문에 답하려면 이 세 계층을 모두 호출해야 하는데, 하나라도 스키마가 바뀌면 전체 파이프라인이 멈춘다.
팔란티어가 ‘AI 전환기, 데이터 주권 해법은 보호·통제·활용’이라는 주제로 내건 키워드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정확도 높은 결과를 위해 기업이 보유한 지침, 내부 문서 등을 AI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메시지였다. 에이전트가 판단을 잘하려면 그 근거가 되는 데이터 자체가 구조화되어 있어야 하고, 누가 어디에 접근할 수 있는지 권한이 정교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맥락에서 다보링크와 비드라프트의 AI Gateway 공동 개발 소식이 꽤 흥미롭다. 특히 양사는 비드라프트의 한국어 문서 처리 기술인 HANJI가 적용된다는 점에서, 국내 업무 환경에서 필수적인 HWP와 HWPX 문서를 정밀하게 다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 실무자라면 이 대목에서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해외 LLM 기반 솔루션은 한글 HWP 문서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경우가 많다. 표 안의 셀 병합, 결재란 주석, 수식 개체 같은 요소가 포함되면 파싱부터 꼬인다. 국내에서 에이전트를 깔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이 바로 이 한글 문서 처리다.
엔비디아가 GPU 설계 과정에서 생성된 아키텍처 문서와 함께 AI를 활용해 개발 기간 300분이라는 수치를 만들어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기사에 따르면 현재 AI는 인간의 개입 없는 완전 무인 설계보다는 엔지니어의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지능형 조력자’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설계처럼 도메인 지식이 극도로 전문화된 영역에서도 AI가 실무자의 어깨를 빌리기 시작했는데, 그 전제 조건은 역시 ‘아키텍처 문서’라는 정제된 데이터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에이전트 경쟁력은 모델 선택이 아니라 데이터 계층 설계에서 결정된다. 2026년 기업 AI 투자에서 예산 우선순위는 명확히 바뀌어야 한다. 좋은 모델을 사는 데 돈을 쓰기 전에, 자기 회사 데이터가 AI에게 먹일 수 있는 형태인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1년 뒤에 “왜 AI 도입했는데 효과가 없을까”라는 보고서만 잔뜩 쌓이게 된다.
버티컬 에이전트의 대약진, 의료·금융·커머스·에너지로 번진 전선
같은 주 뉴스에서 버티컬(수직 산업) 에이전트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이건 범용 에이전트 경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의료 쪽에서는 아브리지(Abridge)가 대형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진료 가이드라인, 보험 정보, 환자 데이터를 EHR(전자의무기록) 환경에서 통합 처리하며 차트 작성, 문서화, 퇴원 계획, 처방 등 임상 워크플로우를 자동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EHR을 지능형 실행 시스템으로 전환해 진료 품질과 의료진 업무 효율을 동시에 끌어올린다는 방향이다.
의료 AI는 규제와 안전성 때문에 도입 속도가 가장 느릴 거라고 예상되던 분야다. 그런데 임상 워크플로우 자동화로 방향을 틀자 상황이 달라졌다. 의사의 판단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의사가 차트를 쓰고 퇴원 계획을 세우고 처방을 정리하는 반복 작업을 대신 처리해 주는 조력자 역할이다. 이 포지셔닝은 규제 리스크를 낮추면서 실제 ROI는 크게 뽑아낸다. 의사 한 명이 하루 10건의 차트 작업 시간을 아끼면, 그 시간이 곧 환자를 더 볼 수 있는 여력으로 바뀐다. 국내 대형 병원 연구팀이 RPA와 AI, OCR 기술을 결합해 보험 청구 사후 검토 과정을 자동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소식도 같은 흐름이다. EMR과 수백 개의 수술·처치 코드 데이터를 자동 대조하는 구조인데, 보험사기 대응뿐 아니라 청구 업무 자체의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린다.
금융권에서는 신한금융이 강력한 AI 에이전트를 내놓으면서 제조사(애플·삼성)와 금융사 간 시너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나금융지주 주가 관심도 상승과 함께 거론된 대목이다. 삼성페이의 범용성과 신한 AI의 결합이라는 구도가 형성된 것인데, 이는 금융 에이전트가 앱 안에만 머물지 않고 디바이스와 결제 레이어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신호다.
커머스에서도 움직임이 명확하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쇼핑 AI 에이전트는 이용자의 구매 의도를 분석해 맞춤형 상품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상품 탐색과 구매 전환율을 높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다만 기사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검색 광고 부문의 성장은 제한적일 전망”이라는 부분이다. 이게 의미심장하다. 에이전트가 검색 결과 화면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추천과 결제로 넘어가면, 기존 검색 광고 비즈니스 모델이 약해진다. 커머스 플랫폼은 에이전트가 살려주는 부분과 잡아먹는 부분을 동시에 계산해야 한다.
에너지 쪽 사례도 신선했다. 세레브라스가 AI 추론칩 시장에서 괴물 성장을 보이며 나스닥 상장을 추진하는 가운데, 재생에너지 기업 에이치에너지가 태양광 발전소 설치 전주기를 자동화하는 AI 에이전트 ‘헬리오스’를 공개했다. “태양광 발전소 설치 원스톱으로, AI 에이전트에 맡겨보세요”라는 슬로건이다. 발전소 인허가, 설계, 시공 스케줄링, 금융 구조화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한 번에 관리하겠다는 시도인데, 이런 유형의 ‘프로젝트 매니저형 에이전트’는 향후 건설, 물류,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버티컬 에이전트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건, 범용 에이전트로는 각 산업의 복잡한 규제와 워크플로우를 커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료는 HIPAA와 EHR 표준이 있고, 금융은 감사 로그와 내부통제가 있으며, 에너지는 인허가 프로세스가 있다. 범용 LLM에 프롬프트만 잘 짜 넣는다고 해결되는 영역이 아니다. 도메인 지식 + 전용 데이터 파이프라인 + 규제 준수 로직이 결합되어야 한다. 여기서 도메인 경험이 있는 스타트업과 전통 기업이 만날 때, 버티컬 에이전트가 탄생한다.
에이전트 플랫폼 전쟁, 개발자가 없으면 에이전트도 없다
에이전트가 늘어나면 당연히 이를 만들고 배포하는 개발 플랫폼 경쟁도 격해진다. 이번 주 키워드는 세일즈포스, 마카나락스, 세레브라스였다.
세일즈포스는 CRM 미래에 답하는 차원에서 헤드리스 360을 공개했다. API와 MCP(Model Context Protocol)로 에이전트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취지인데, “AI 에이전트가 SW 사업 모델을 확 바꿀 것이며 헤드리스 전환은 불가피하다”라는 관점이 함께 제시됐다. 헤드리스 전환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기존 CRM은 사용자가 화면을 보고 클릭하는 구조였다면, 헤드리스 CRM은 에이전트가 API를 호출하는 구조가 된다. 사람이 아닌 에이전트가 사용자가 되는 셈이다. 이 변화는 CRM뿐 아니라 ERP, HRM, 심지어 e-커머스 플랫폼까지 전방위로 번질 것이다.
MCP는 이 변화의 핵심 연결 고리다. 지난 몇 달간 에이전트 판에서 가장 빠르게 부상한 표준인데, 에이전트가 외부 도구·데이터에 접근하는 프로토콜을 일원화한다. 세일즈포스가 MCP를 공식 지원한다는 건, 사실상 ‘CRM 데이터에 에이전트가 접근하는 표준 통로’를 열겠다는 선언이다. 국내에서는 조경협회가 이미 MCP 기반 서브 에이전트를 실무에 투입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제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SaaS까지 MCP를 기본 장착으로 가져간다. 이 속도는 작년 이맘때 예상하던 것보다 최소 6개월 이상 빠르다.
마카나락스 IPO 소식도 흥미롭다. 300억대 공모자금을 활용해 AI OS를 고도화하겠다며 런웨이(Runway) 플랫폼을 개발했고, 최근 런웨이 2.0을 출시했다. 데이터 통합부터 멀티 모델 관리와 운영(MLOps)까지 커버한다는 구조다. 국내에서도 에이전트 인프라 레이어에 본격 투자가 들어가는 것인데, 이는 곧 “모델을 고르는 시대에서 플랫폼을 고르는 시대”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플랫폼 관점에서 실무자들이 가장 자주 하는 실수 하나만 짚어 두자. 에이전트 초기 개발 단계에서는 도구 호출과 LLM 응답만 잘 나오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프로덕션으로 가려면 MLOps·LLMOps 레이어가 반드시 필요하다. 프롬프트 버저닝, 응답 품질 모니터링, 비용 관리, A/B 테스트, 모델 교체 시 회귀 테스트. 이 다섯 가지가 받쳐주지 않으면 에이전트를 운영하는 비용이 모델 API 비용의 몇 배로 불어난다. 런웨이나 마카나락스 같은 플랫폼이 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레브라스의 부상도 이 흐름과 맞물려 있다. 추론 비용은 에이전트 시대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다. 에이전트 한 번의 판단이 여러 차례 LLM 호출을 유발하고, 멀티에이전트는 그 횟수가 기하급수로 뛴다. 추론 칩이 싸지지 않으면 에이전트를 24시간 돌리는 서비스는 수익성이 깨진다. 세레브라스가 ‘괴물 성장’이라는 수식어를 받는 배경에는 바로 이 추론 비용 문제가 있다.
2026년 SaaS 위기론, “일주일 전 기술이 옛날 얘기”
이 모든 흐름의 뒷면에서 한 가지 불안한 신호가 함께 흐르고 있다. 실리콘밸리 분위기를 전한 한 기사에 따르면, 빅테크들이 AI에 사활을 걸고 일주일 전 기술이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는 속도로 변화하면서, AI 에이전트가 등장하며 일부 기능이 소프트웨어를 거치지 않고도 수행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 영향으로 SaaS 기업 주가가 하락했다는 내용이다. 다만 소프트웨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졌다.
이 뉴스가 던지는 울림이 꽤 크다. 지난 10년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SaaS 비즈니스 모델이 에이전트 시대에 근본적인 질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SaaS는 ‘사람이 웹 UI에서 작업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좌석 기준 구독료, 사용자 활성화 지표, 온보딩 UX. 이 모든 것이 ‘사용자는 사람’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사람 대신 에이전트가 API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에이전트는 UI가 필요 없다. 클릭할 일이 없으니 화면 설계가 가치를 잃는다. 에이전트는 몇 초 만에 수백 번의 API 호출을 할 수 있으니, 좌석 기반 과금이 무너진다. 에이전트는 하나의 UX를 지속적으로 학습하지 않고 매번 새 판단을 하니, ‘사용자 리텐션’ 같은 지표의 의미가 달라진다.
내가 속한 업계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이 위기감이 실제로 깊다. 고객사에 들어가면 “우리가 구독하던 SaaS들을 에이전트로 대체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노골적으로 나온다. 물론 모든 SaaS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사도 그 점은 분명히 했다. 데이터베이스, 인프라, 특정 도메인 지식이 깊게 쌓인 SaaS는 오히려 에이전트의 연료 공급처가 되어 살아남는다. 그러나 단순 UI 래퍼형 SaaS, 즉 API 호출을 예쁘게 감싸서 구독료를 받던 서비스들은 에이전트에 잠식될 가능성이 높다.
이 현상은 거꾸로 엔터프라이즈 AI 에이전트 시장이 얼마나 큰지를 증명한다.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SaaS 주식을 내다 팔고 AI 인프라와 에이전트 기업으로 돈을 옮기는 중이다. 지난 몇 분기 동안 클라우드 지출에서 AI 관련 워크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올라가고 있고, 이 추세는 더 가팔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기업 관점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국내 SaaS는 미국 대비 발전 속도가 뒤쳐져 있었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번 전환기에서는 ‘건너뛰는’ 기회가 있다. 미국 기업은 기존 SaaS 스택에 에이전트를 끼워 맞춰야 하는 마이그레이션 비용이 큰 반면, 국내 기업은 처음부터 에이전트 기반 아키텍처로 갈 수 있다. 카카오, 네이버 같은 플랫폼이 커머스 AI 에이전트에 공격적인 이유, 하나금융·신한·저축은행이 AI 에이전트팀을 신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발 주자의 추월 기회는 세대 전환기에 열린다.
마무리: 지금 당장 점검해야 할 세 가지 질문
이번 주 뉴스들을 한 줄로 묶으면 이렇다. RPA 시대가 저물고, 에이전틱 AI가 ‘직무 자동화’에서 ‘조직 대체’로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이를 받쳐줄 데이터 인프라와 플랫폼 레이어의 전쟁이 본격화됐고, 의료·금융·커머스·에너지 같은 버티컬 영역에서 이미 성과가 쌓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통 SaaS 모델은 에이전트 앞에서 비즈니스 모델 재검토를 강요받고 있다.
실무자 관점에서 이 전환기를 지나는 조직이 지금 꼭 던져야 하는 질문은 세 가지다.
첫째, 우리 조직의 데이터는 AI가 먹을 수 있는 형태인가. HWP와 PDF와 스캔 이미지가 뒤섞인 채 팀 공유 드라이브에 쌓여 있다면, 어떤 최신 LLM을 붙여도 효과는 제한적이다. 오라클이 그래프DB·문서DB·벡터DB 통합을 꺼낸 배경, 팔란티어가 데이터 주권을 강조하는 이유, 다보링크-비드라프트가 한국어 문서 처리에 방점을 찍는 맥락이 모두 여기 닿는다. 모델보다 데이터가 먼저다.
둘째, 우리 조직의 업무는 ‘직무’인가 ‘조직’인가. 특정 반복 작업만 자동화하고 싶다면 RPA로 충분하다. 여러 직무가 얽힌 워크플로우 전체를 바꾸고 싶다면 에이전틱 AI가 맞다. 이 판단을 흐리면 과잉 투자나 과소 투자로 끝난다. 신한·하나·저축은행이 AI 에이전트와 RPA를 한 팀에 묶은 구조는 이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안이다. 조직 수준 전환은 에이전트가 지휘하고, 잔여 레거시는 RPA가 뒷정리한다.
셋째, 에이전트가 내린 판단을 누가 책임지고 어떻게 추적할 것인가. 금융 규제의 설명 가능성, 의료의 환자 안전, 공공부문의 투명성. 어느 영역이든 “왜 이렇게 판단했는가”를 사후에 재현할 수 없는 에이전트는 프로덕션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MLOps·LLMOps 레이어 투자가 필수가 되고, 런웨이·세일즈포스 헤드리스 360 같은 플랫폼 선택이 중요해진다.
이 세 질문에 “지금 답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2026년은 기회의 해다. 답이 막히는 조직이라면, 지금 시작해야 할 일은 모델 선정이 아니라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RPA 봇을 몇 개 더 배포하는 것으로 이 전환기를 버틸 수는 없다. 조직의 일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시점이 이미 왔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SaaS 주가가 말해주듯, 이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훨씬 멀리 간다.